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브뤼셀과 헤이그 시절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1b0c98878a7e61909398f028d95ad506.jpg|width=100%]]}}} || || {{{#white '''1880년 8월 그림'''}}} || 브뤼셀로 온 고흐는 화가가 되기 위해 조언을 구했다.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상식적이고 일반적 코스이긴 했지만 고흐는 독학으로 실력을 쌓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만 그림실력은 조금 떨어졌다.] 고흐가 브뤼셀에 왔을 때 동생 테오는 화상의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승진 중이었다. 한편으로 테오는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편지를 통해 형 고흐에게 알려주기도 했지만 원래 미술이란 게 글로 쓴다고 이해할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흐의 인상주의나 새로운 미술사조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고흐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의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에게 몇 년간 그림을 지도받았다. 하지만 고흐의 괴상한 성격 탓에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모베는 어려운 고흐를 돕기도 했고 나름대로는 그림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는 크리스티네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이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매춘부인 데다가 딸이 하나 있었고 고흐와 만났을 때는 임신 중이었다.[* 이때 시엔이 임신한 아이가 고흐의 자식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일었지만 고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서 시엔의 임신한 아이가 고흐와는 무관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녀는 딱히 용모가 뛰어나다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고흐에겐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데다가 고흐 자신이 비극적인 풍모의 여성들에게 끌렸던 점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목사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동안 그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던 동생 테오마저도 시엔과의 동거를 반대하면서 그녀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모베는 고흐가 매춘부와 동거한다는 사실에 그와 절교를 선언했다.[* 물론 모베와의 절교가 시엔과의 동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흐는 모베가 자신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강요한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큰 골이 깊어져 있던 차였다. 시엔과의 동거는 결별을 위한 핑계거리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고흐의 구필 화랑 시절 상사이자 좋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테르스테흐가 고흐가 시엔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과도한 분노를 표출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고흐의 아버지가 시엔과의 동거를 알게 된 것도 테르스테흐가 편지를 보내서였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리되자 고흐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마침내 완전히 미쳐버렸어'''라면서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소식이 테오의 편지를 통해서 고흐 귀에 들어가자 고흐는 아버지에게 격한 분노를 품었고 이때껏 아버지를 존경해오던 고흐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물론 조직화된 기독교회 자체에 심한 분노와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매춘부 생활로 돌아가려는 시엔과 시엔의 가족들 때문에 시엔과의 관계는 결국 파탄나고 큰 양심의 가책을 안고서 고흐는 그녀와 결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